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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북? 울트라북? 혼란스러운 HP의 구색 갖추기

늑돌이 201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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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PC 제조사 가운데 1위인 HP는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PC 분야에 새로운 조류가 닥쳐올 때 그런 경우가 종종 보이죠.

대표적으로 넷북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HP 자체적으로 넷북에 대응하는 2133 미니라는 모델이 있었지만 VIA 프로세서를 사용하여 아톰을 이용한 대만 업체들에 비해 느리고 발열이 심한데다가 배터리도 짧아서 예쁜 디자인과 해상도 등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크게 빛을 못 봤던 제품입니다. 결과적으로 HP는 델과 마찬가지로 넷북 시장을 대만 업체에게 내주며 에이서와 아수스가 세계 PC 시장에서 도약하는 기회를 주죠.

이는 작년부터 인텔이 홍보하고 있는 울트라북에서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HP는 분명 울트라북 시장에 참가하긴 했지만,


이때 소개된 Folio 13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 제품이었습니다.

오른쪽이 폴리오 13


배터리가 오래 가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무게는 1.5kg으로 이전의 울트라씬 노트북 급입니다[각주:1]. 두께는 18mm로 다른 노트북보다야 분명 얇긴 한데 울트라북 가운데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편은 못 됩니다. 손 크고 힘 좋은 북유럽 계통의 미국인들을 위해 만들었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아무튼 이 폴리오 13은 울트라북 시장에서 큰 재미는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HP가 이번에 HP Global Influencer Summit 2012이라는 행사를 통해 울트라북 말고도 새로 슬릭북(Sleekbook)이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슬릭북이란 이름에서부터 'sleek'이라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단어가 들어가 있죠. 여기서 sleek 은 매끄러운, 단정한, 번지르르한 등의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일단 겉모습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단어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 슬릭북의 정체가 뭔지 알기 위해서는 HP의 입장부터 헤아려야 합니다.
지금 울트라북이 지금 잘 되는 거 같은데, HP는 아직 이 분야에서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경쟁자들의 브랜드 가치는 HP를 못 따라가고 유통망도 마찬가지지만 울트라북을 통해 나온 제품 만의 경쟁력은 만만치 않습니다. 경쟁사들은 폴리오 13보다 더 얇고 가벼운 제품들을 많이 내놓았으니 말이죠. 그래서 HP는 아마도 자사의 강점을 돌이켜 본 게 아닐까 합니다.

인텔이 거의 다 지배하고 있는 PC 프로세서 시장입니다만, HP는 인텔 말고 다른 회사와도 꾸준히 거래를 하는 곳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넷북 이전의 미니노트북인 HP 2133 미니는 VIA의 C7M을 달고 나갔도 AMD 프로세서 또한 채용[각주:2]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한다는 울트라북은 인텔의 브랜드입니다. 그래서 울트라북이라는 이름으로는 인텔 프로세서, 그것도 정해진 것들 말고는 쓸 수 없습니다. 그건 HP 뿐만 아니라 울트라북을 만드는 모든 회사가 마찬가지죠.

그래서 HP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울트라북하고 비스무리한데 조금 더 저가형으로, 인텔 뿐만 아니라 AMD 프로세서도 쓰는 노트북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말이죠. 기왕이면 울트라북에서 쓰지 않는 인텔의 저가형 프로세서까지 포용하고, 저장장치도 SSD에서 벗어나는 등 가격을 더 낮추고 말이죠. 대신 이건 인텔의 울트라북과는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나온 이름이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슬릭북이 아닐까 합니다.


HP 측에서는 같은 라인업에서도[각주:3] 슬릭북을 울트라북보다 한단계 낮은 등급으로 취급한다고 하니, 울트라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훨씬 낮은 가격으로 울트라북의 일부 특징을 맛볼 수도 있겠죠. 성능보다는 저가격에 울트라북의 특징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제법 매력적인 제품일 수도 있겠습니다. 인텔에게 사정없이 눌리고 있는 AMD[각주:4]에게도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울트라북과 더불어 슬릭북도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각각 시장을 키워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현실적으로는 많이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슬릭북으로 나온 제품들 모두 한국에서 휴대용으로 인기있는 13인치급이 아닌 14/15인치급 제품들이에요. 역시 힘좋은 북유럽 계통 미국인들을 위해 최적화된 슬릭북당장 나온 제품만으로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슬릭북의 기존 울트라북 대비 가지는 매력은 애매한 수준일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슬릭북이라는 단어는 HP만 쓰는 것이죠. 울트라북이나 넷북처럼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제품의 구분은 아닙니다. 상표권도 HP가 갖고 있겠죠. HP가 과연 타 제조사에 이 슬릭북이라는 명칭의 사용을 허용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결국 소비자들은 HP만 쓰는 용어 하나를 더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인상도 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슬릭북이라는 명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비자가 아닌 HP만의 입장에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HP는 울트라북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하드웨어들로 슬릭북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명확한 정의를 내렸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조사 입장에서의 편리함이 한 가득 녹아있는 명칭이죠. HP 입장에서는 울트라북 하위의 비어있는 라인업을 슬릭북으로 메우는 효과를 거뒀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울트라북과 슬릭북의 차이는 이해하기 힘들고 실제로 제원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전에는 구별하기도 힘듭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수년에 걸쳐 넷북과 울트라북을 이해했는데, 이번에는 슬릭북이라는 단어를 새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겠죠. 알고보니 울트라북과 큰 차이도 없는 용어인데 말이죠.


제 의견은 HP가 슬릭북이라는 분류를 만든 것은 그다지 급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울트라북 또는 울트라북에 해당하는 제품군을 한두가지라도 확실히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다음에 그 분류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게 나았을 거라고 봅니다. 성공한 제품들을 가지고 분류를 만들어 낸다면 몰라도 분류를 만들고 제품을 만들면 그게 과연 소비자에 정말 필요한 제품일지, 그 분류의 구색맞추기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현 시점에서 HP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북'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소비자가 그런 분류 따위는 잊어버릴 만큼 매력적인 노트북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리라 믿습니다. HP를 알긴 하지만 요즘에는 관심을 별로 안 갖던 이들의 눈을 끌 만큼 말이죠.




  1. 다른 울트라북은 1.1~1.3 kg의 무게가 보통입니다. [본문으로]
  2. AMD의 Yukon 플랫폼을 처음 채택한 곳도 HP죠. [본문으로]
  3. HP의 Thin & Light로 들어가고 현재 나온 제품들은 모두 ENVY 계열입니다. [본문으로]
  4.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15.6인치 슬릭북에만 AMD의 APU가 채용된다고 합니다만, HP 홈페이지에는 인텔 프로세서 일색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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