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녹음, 녹화, 사진 등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법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양해져왔다. 그러나 가장 원초적인 것 중 하나인 글쓰기는 여전히 즐겨 이용되고 있다(지금 이것도 글로 적고 있다).
글쓰기가 가지는 매력은 여러가지다. 뛰어난 보존성, 가장 기본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에서 생기는 상대적인 저비용, 다른 매체로의 폭넓은 변환가능성 등. 그렇게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글을 위한 새로운 도구의 발명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먹과 대나무판(竹簡)에서 시작, 볼펜과 종이까지 달려온 현대의 필기용구들은 가장 사랑받는 글쓰기용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필기용구와는 별도로 글쓰기를 위한 도구에도 혁명적인 사건이 한번 있었다. ‘필기’가 아닌 ‘타자기’, Typewriter의 등장이다. '영국을 대표로 하는 알파벳 사용의 서구문명권이 근대에 들어와서 아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타이프라이터의 발명'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글쓰는 속도라는 측면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 혁명적인 도구는 또 다른 혁명적인 도구인 컴퓨터에 있어서도 기본 입력도구인 키보드로 채택되었다.
컴퓨터와 키보드와 결합은 또 다른 진화를 만들어 낸다.
마침내 디지털 기기 + 글쓰기가 만난 것이다. 디지털 기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추가, 삭제, 복사, 수정 등 다양하고 편리한 편집 기능을 제공하는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이었다. 한때 워드프로세서 전용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로 글쟁이들에게 이 ‘디지털로 글쓰기’는 대환영인 사건이었고, 글쟁이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쓰는 대부분의 PC에서도 워드프로세서는 거의 필수적인 프로그램으로 설치되어 있을 정도가 되어버리고, '디지털로 글쓰기' 도구 첫번째 순위는 PC가 차지한 후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현재 표준화되다시피 한 PC용 키보드는 이른바 QWERTY 자판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키보드와는 별도로 컴퓨터에 글을 입력하기 위한 다른 입력수단도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역시 키보드 이상 가는 것은 아직 찾기 힘들다. 아마도 제대로 입력되는 구술기(말->글로 변환)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로 글쓰기’가 일반화 되면서, 사람들은 더 편한 방법과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한가지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주제는 바로 휴대성. 이 글에서는 이제부터 휴대성에 집중하게 된다.
종이와 볼펜. 언제 어디서라도 꺼내 사용할 수 있으며, 보관하기도 간편하다. 이 휴대성 최고인 조합을 디지털 기기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첫 해답은 이동가능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였다. 하지만 이는 다기능인 노트북PC에 의해 바로 사멸해 버렸고, 다기능과 이동성을 무기로 한 노트북PC의 ‘디지털로 글쓰기’의 절대적인 우월성은 철옹성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도전하고 있는 기기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기 또한 역시 휴대성.
자, 여기서 살펴보자. 대략 2~4kg 정도인 일반 노트북PC의 휴대가 가능하긴 하나, 이동성에 초점을 맞췄지, 부담없이 휴대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이런 어정쩡한 휴대성에 반기를 든 선두 주자는 바로 PDA 기반의 제품들이다.
인스턴트온(Instant On)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전원을 켜고 끄는데 상당한 부담을 안아야 하는 노트북PC와는 다르게 수첩을 쓰듯 언제든 켰다 끌 수 있는 능력은 상당한 매력이었다. 크기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데이터의 대부분은 PC에서 가져올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간단한 필기 입력만을 지원했으나, 기기의 발전에 따라 키보드를 채용, 겉보기에는 작은 노트북PC처럼 보이는 이른바 HandheldPC(이하 HPC) 제품군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HPC 제품군은 제품의 완성도에 비해 노트북PC의 가격에 거의 근접할 정도로 비쌌고 홍보도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 외면받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목받다가 사라져 버렸다. 일반적인 팜 사이즈의 PDA는 나름대로 시장을 개척했고, 현재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글쟁이들에게 매력을 주기에는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HPC는 거기서 생명이 끝나지는 않았다. 비록 기능, 성능, 완성도 면에서는 기존의 노트북PC를 못 따라가지만 반대로 노트북PC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스턴트온 기능과 주머니에 아무렇게 넣고 다닐 수 있는 안정적인 휴대성(하드디스크가 없다는 점에서)은 글쟁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매력적인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HPC들은 부활했다. 비록 구세대의 제품이지만, 팔리지 않았던 재고들이 시장에 싼 값으로 나오고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들도 적절하게 가격이 낮아지면서 중고시장에 풀려 실질적인 이용자와 결합한 것이다. '어디에서나 글을 쓴다'는 고유의 임무에 있어서 HPC는 노트북PC가 주지 못한 만족(완벽하진 않아도)을 글쟁이들에게 준 것이다.
그 선두에 선 제품이 바로 일본 NEC와 NTT Docomo에서 만든 시그마리온 시리즈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모디아. 2003년 회사의 어려움으로 시장에 약 30만원 정도의 가격(정가는 그 3배 정도로 기억한다)으로 풀린 모디아(의 재고품)는 그전까지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HPC를 좀 더 대중화하는 역할을 했다.
모디아 같은 일본계와는 극단에 서있는 컨셉으로 미국계의 대표격인 조나다 700 시리즈 또한 다시 한번 재조명되었다.
그리고 마침 그 해 일본 시장에서 출시한 마지막 고성능 HPC라고 불리우는 시그마리온3의 성능은 키보드와 최신 PDA 기술이 결합한 시너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으며, 또한 꾸준히 과거의 명기로서 삼성전자의 이지프로, LG전자의 모빌리언 시리즈들 또한 한 자리를 차지했다.
< 고성능과 다양한 확장성을 자랑하는 시그마리온3 >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조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트북PC의 초소형화.
서브노트북(2kg 내외) 밑의 미니노트북(1kg 내외)이라는 분류를 만들어낸 일본의 노트북 회사들은 PC의 기능은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초소형화를 이루면서 HPC에 만족하지 못 하는 글쟁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아쉽지만 더 이상 후속기종이 등장하지 않는 HPC 제품군은 조금씩 설 자리를 잃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 타이핑도구라면 몰라도 구형 제품이 대부분인 HPC는, 아니 가장 최신이라 할 수 있는 시그마리온3조차 웹서핑이라는 기본적인 기능도 100% 이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글쟁이에게도 자료조사, 원고제출 등 웹서핑은 필수다). 거기에 더하여 미니노트북은 HPC의 장점을 하나하나 흡수하고 있다. 예를 들어 Windows 차기 버전에서는 기존의 최대절전모드보다 더 강력한, 인스턴트온(또는 그에 가까운) 기능이 제공된다고 한다. HPC의 가장 강력한 장점 하나가 노트북PC에서 구현되는 셈이다.
이렇게 HPC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흡수한 새로운 세대의 미니노트북들은 지금 HPC가 있는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 지위는 언젠가 등장할 ‘제대로 된 구술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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